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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앙트완 부르델(Bourdelle, Emile Antoine:1861-1929)의 소개 - 일생과 작품 세계
현대 조각의 기둥으로 불리는 에밀 앙트완 부르델(Bourdelle, Emile Antoine:1861-1929)은 1861년 10월 30일 프랑스 몽토방(Montauban)에서 가난한 목공예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형편으로 어려서부터 직공으로 가구제작 일을 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예술적인 운명에 대한 영감(靈感)을 깨닫게 되었고, 그의 예술인생은 근대 조각계의 거장 오귀스트 로댕(Rene-Franois-Auguste Rodin)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그는 15년여간 짧지 않은 세월동안 로댕의 제자로 있으면서 평생 스승인 로댕에 대해 사랑과 존경, 그리고 경외(敬畏)의 마음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소묘와 점토를 즐겨 다루었으며, 이러한 재능이 인정되어 1876년 툴루즈미술학교(Beaux-Arts de Toulouse)에 입학한 후 곧이어 장학생이 되고, 1884년에는 파리로 나와 파리미술학교(Beaux-Arts de Paris)에 진학하여 그 당시 이색적인 작가였던 팔기에르(Jean Alexandre Joseph Falguiere:1831-1900)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미술학교에서 풍기는 형식적인 아카데믹(Academic)한 분위기와 교육방침에 실망과 싫증을 느껴 학교 당국과 몇 차례 의견충돌 끝에 그 스스로 학교를 중도에 자퇴한 다음 독학으로 조각 작품제작활동에 전념을 다하게 된다. 그리고 1889년에 열린 살롱전에서 출품된 그의 작품이 당시의 조각계의 위대한 거장으로 군림하던 오귀스트 르네 로댕에 의해 그의 예술적 재능이 눈에 띄어 수제자겸 조수로 들어가 장기간 사제관계를 맺게 된다.(1893∼1908) 그러나 건축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았던 그전의 전통적 조각양식과 사실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조각자체에 새로운 생명과 감정을 이입(移入)하여 예술적인 내면성과 자율성을 추구했던 스승 로댕과는 대조적으로 부르델은 고대 그리스(Greek)의 고전적 아르카이크 조각과 로마(Rome)의 조각형식 그리고 이집트 조각미 추구와 아울러 멀리 나아가서는 전성기의 고딕조각 등을 탐구하는 등 조각에의 엄격한 형식미와 함께 견고한 구축미(構築美)에 의한 신선한 정취(情趣)가 넘치는 조각 제작을 통한 고전에의 복귀(復歸)를 지향(指向)하고, 또한 건축적인 요소가 깊숙이 가미된 기념비풍(記念碑風)의 조각에 속하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독자성을 서서히 정립하게 된다. 1888년 첫 작품인 음악가 베토벤(Beethoven)상을 제작한 후 만년에 이르기까지 총 20여개에 달하는 베토벤상을 만들게 되며, 1893년에 주문받은 <몽토방 위령비>는 6년에 걸쳐 완성한 그의 불후의 작품으로 나중에 제작하게 되는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Herakles:1909년)>와 함께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Herakles)>는 로댕의 후계자로서 스승의 영향이 엿보이는 최초의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외에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페넬로페(1907년)>와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1910년)>, 미국 여성 무용가인 이사도라 던컨(1878∼1927)과 러시아 무용가인 니진스키(1890∼1950)의 무용에서 구상된 파리 샹젤리제(Champs-Elys es) 극장의 <프리즈(Friez-연속된 띠부조) 장식부조 작품(1912년)>과 <빈사의 켄타우로스(Kentauros:1914년)>, <코벨레 박사(1914년)>, 보즈의 산 속에 설치된 거대한 작품인 <알자스(Alsas)의 성모자(聖母子:1923년)>, 그리고 아르헨티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알베아르 장군 기마상(1926년)>과 <라 프랑스(1926년)> 등이 있다. 조각가 부르델에게 예술인생의 반 이상을 함께 한 그의 스승 로댕의 존재는 부르델의 작품생활 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에 차지하는 위치는 참으로 대단하였다. 조각가로서 그의 명성도 로댕이라는 출중한 스승을 만나 더욱 빠르고 탄탄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1893부터 1908년까지 수제자이며, 작업의 협력자로 로댕의 곁을 장기간 지키게 된다. 1909년 그는 과감하게 조각에 있어서의 그와의 정체성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길을 걷고자 장장 15년동안 함께 예술혼(藝術魂)을 불태웠던 그의 스승 로댕의 곁을 과감하게 떠나 독립적인 주체로서 홀로서기를 시작하였지만 아직도 부르델은 <로댕의 흉상(1909년)>과 <뒤로 젖힌 로댕(1910년)> 등 그를 모델로 한 작품들을 계속적으로 제작해 스승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과 존경심을 표현하곤 하였다. 이미 68세에 가까운 노년의 로댕의 거장다운 위엄과 무게감과 아울러 거센 수염이 물결치는 힘이 표현된 그의 초상은 나중에 이 작품을 본 로댕이 100년 후에나 사람들이 이해할만한 선구적(先驅的)인 작품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시대를 앞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을 살펴보면 대상을 그대로 묘사하는데서 벗어나 대상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모습을 주관적으로 해석해 표현하고자 하였고 이는 곧 현대 미술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이념이기도 하였다. 부르델 조각은 로댕 밑에서 수제자로서 수학한 1900년부터 스승 로댕의 복잡한 여성편력문제로 로댕의 작업실을 나와 독립한 시기인 1910년까지와 1910년 이후 사망하기까지의 두 시기로 크게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는데, 1900년에서 1910년까지는 대상의 내면세계의 표현에 깊게 심취한 시기로 이때에 제작된 작품인 <바람 속의 베토벤>, <절규하는 사람들> 등에서 인간적인 고뇌와 같은 내적인 감정들이 극적(劇的)으로 표출(表出)되었고, 1910년 이후에 제작된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 <뮤즈>시리즈 등에선 부조(浮彫)와 같이 다소 평면적이고 단순화된 형태로 사물들의 형태를 왜곡(歪曲) 및 변형시키고 단순화시키는 작업을 함으로서 스승 로댕의 그늘에서 서서히 벗어나 그 나름대로의 새로운 형식의 현대 조각이라는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조각에 있어서 그의 스승 로댕의 극적(劇的)이고 시정(詩情)이 넘치는 작풍(作風)을 극복하고 건축적(建築的)인 덩어리와 양괴(量塊)에 입각하여 특히 기념비조각(記念碑彫刻)에서 독자적인 예술의 경지를 극명하게 발휘하였으며, 이는 현대 조각에 있어서의 고전적인 양식의 부활과 함께 기념비적인 자율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건축적인 구성과 양식에의 복귀를 추구를 의미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시도는 오랫동안 건축의 지배 하에 있던 그 당시의 조각에 근대 예술로서의 독자적 자율성을 부여한 상징적(象徵的)인 의미의 제시와 함께 엄격한 형식미를 추구한 견고한 구축 가운데서도 신선한 정취(情趣)가 부여된 독자적인 작풍의 확립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1929년 폴란드 독립기념비인 <폴란드 시인 미키에비츠(Adam Bernard Mickiewiez)상 기념비>제막식에 참석한 후 그 해 10월 1일, 근대 조각계의 커다란 상징의 하나였던 로댕의 그늘에서 벗어나 현대 조각으로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 그는 프랑스 르 베지네(L'vesinet)에서 68세의 나이에 조용히 눈을 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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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르네 로댕(Aguste Rodin)과 앙트완 부르델(Emile-Antoine Bourdelle)은 프랑스 근대조각을 논할 때 반드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앙트완 부르델, 오귀스트 로댕 등은 아리스티드 마이욜( Aristide Maillol, 1861-1944, 프랑스 )과 함께 유럽 근대 조각의 세 거장으로 꼽힌다. 파리 출신의 로댕은 그의 작품 속에서도 세련된 파리쟌느의 취미가 느껴지는 반면, 프랑스 남쪽의 몽토방 출신인 부르델의 작품은 건강한 힘과 투박한 기질로 가득차 있다. 로댕은 조각을 공부하기 위하여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 응시하지만 세번씩 낙방을 하고 결국은 독학으로 조각가의 꿈을 이루고 만다.
반면 부르델은 고향 마을의 장학 기금으로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나 얼마 가지 않아서 관학의 고리타분하고 구태의연함에 회의를 품고 학교를 스스로 자퇴해 버린다. 로댕과 부르델은 생계를 위해 낮엔 일하고 오후엔 미술관을 방문하거나 끊임없이 습작을 되풀이 하면서 그들의 작품세계를 서서히 정립해 나갔다. 또한 그 두사람은 자신들의 부족한 예술적 교양을 채우기 위해서 부지런히 책을 읽고 다른 쟝르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로댕은 평생 독신으로(동거하던 로즈라는 모델이 있었으나 노후에 결혼하자마자 사망하였다.) 여러 여자들을 거친 반면에 부르델은 정상적으로 결혼하여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하였다. 조각에 근대 예술로서의 자율성을 부여하고 소재의 선택에서도 보다 회화적이고 연극적인 근대성을 중시한 스승과 달리, 부르델의 작품은 오히려 조각적이며 건축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서 부르델은 건축적 구성과 양식이라는 유럽 건축의 오래된 전통으로 복귀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부르델의 작품들 속에는 고대 이집트에서 발원해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흘러온 기다란 전통이 응축돼 있다. 로댕은 작품이 담고 있는 감정표현에 강한 의미부여를 한 반면, 부르델의 경우는 조각 자체가 가지는 건축적 구축성의 탄탄함에 강한 주제성을 가미했다고 볼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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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파르나스묘역에 안장된 부르델의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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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는 양(量)으로 조형하고, 음악가는 음조(音調)로 작곡할 뿐 근본적으로 음악과 조각은 같다." 부르델(Emile Antoire Bourdelle, 1861~1929)은 남프랑스 몽토방(Montauban)에서 가난한 가구 제작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보다 나무조각과 데생에 열중했던 그는 툴루즈 미술학교(Beaux-Arts de Toulouse)를 거쳐 1884년 시(市) 장학금으로 파리 미술학교(Beaux-Arts de Paris)에 진학했다. 그러나 아카데믹(Academic)한 교육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스승 팔기에르(Jean Alexandre Joseph Falguiere:1831-1900)와 빈번한 충돌을 일으키던 부르델은 2년만에 독학의 길로 나섰다. 1888년 부르델은 베토벤의 음악을 접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예술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음악과의 교감(交感)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간파한 그는, 그해부터 베토벤의 흉상과 입상을 만들기 시작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크고 작은 조각상과 수없이 많은 데생과 파스텔화를 그렸다. 초기 청동상은 모델에 대한 충실한 재현(再現)에 고심했으나, 1901년부터는 형체가 한결 긴장감을 지니며 자유롭고 힘찬 개성적인 풍모로 나아가 이미 단순한 초상이 아니라 대상 내면의 힘을 포착하고 역동하는 영혼 자체를 표출해내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부르델은 정신과 재료가 결합된 형체의 종합적인 통일을 추구한 결과 1909년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 같은 대역작을 만들어냈다. 고전(古典) 양식에 뿌리를 둔 엄격한 형식미를 추구했던 부르델은 특히 거대한 기념비(記念碑)적인 작품들을 통해 웅대한 양감(量感)의 공간을 거침없이 구축(構築)해냄으로써 근대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조각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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