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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렘브란트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7.15~1669.10.4)

또하나의세상2 2008. 12. 12.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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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하르먼스존 판 레인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7.15~1669.10.4)


    Rembrandt: Self-Portrait
    Self Portrait, 1627,
    oil on canvas, Staatliche Museen Kassel, Gemäldegalerie Alte Meister

    네덜란드의 화가·판화가. 레이덴 출생.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17세기 유럽 회화사상 최대의 화가이며, 루벤스와 함께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네덜란드 화가이다. 그러나 루벤스가 화가로서 성공을 거두고 부유했던 반면, 렘브란트는 가난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가 죽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옷 몇 벌과 그림 도구 뿐이었다고 전해진다.

    17세기초(1609), 네델란드는 카톨릭의 종주국으로 자처하여온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칼빈주의를 국교로 삼았다. 이 신생국은 막강한 해외 무역국가로 성장하며 부유한 부루조아지 문화를 꽃피운게 된다. 이 황금시대에 미술의 수요가 늘고 위대한 미술가가 탄생되는 것이다.

    렘브란트는 네델란드의 라이덴에 사는 제분업자인 아버지 하렌 반 라인(Harmen Van Rijn)과 자상한 성격을 갖고 있는 어머니 사이에서 1606년 7월 15일 태어났다. 그는 수공업자로 길러진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많은 고전교육을 받았고, 라이덴 라틴학교와 대학에 진학했으나 1년도 못되어 중퇴하였`다. 이것은 학자가 되기를 원하는 그의 아버지의 고집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그는 대학을 포기하고 그대신 화가의 공방을 찾아 화가수업을 시작하였다. 그의 이러한 전환은 계급이나 권위, 또는 직업의식에 그렇게 매달리지 않았던 당시 사회의 실정으로 보아서 쉽게 가능하였고 그의 아버지 또한 렘브란트의 의지를 굳이 꺾지는 않았다고 한다.

    15세인 렘브란트가 처음 찾아간 공방은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라이덴의 화가 야곱 반 스와넨브르크(Jakov Van Swanenburg)의 공방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약 3년간 머물렀지만 기초적인 회화 기술을 습득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영향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년 렘브란트가 자신에게 보다 적합한 선생을 만난 것은 암스테르담에서 였고 그는 피터 라스트만(Pieter Lastman)이라는 화가였다. 라스트만은 이탈리아 양식으로 거대한 역사화를 그려 당시 일반에게 주목받던 화가로서 이탈리아에 가서 화가수업을 한 화가였다. 렘브란트는 그곳에서 6개월간을 보냈는데 라스트만은 이탈리아로부터 카라바조 및 엘스하이머의 영향을 네덜란드에 도입한 일련의 이야기 화가들, 이른바 <렘브란트 전파(前派;Pre―Rembrandtists)>의 대표자로, 구약성서에서 작품의 소재를 취하여 전세대의 기교파와는 대조적으로 우의성(寓意性)을 배제하고 이야기의 명쾌한 서술을 지향한 그의 회화는 렘브란트에게 영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 이후 렘브란트는 더 이상 누구에게서 그림을 배운적도 없으며 당시의 유행이었던 이탈리아 여행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은 후기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상당한 고전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이와 다른 북유럽적 특성을 고수해나간 렘브란트 세계의 한 비밀을 밝혀주는 요소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렘브란트의 화업이 시작된 라이덴 시절(1625∼1631)에 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전체적으로 다른 화가에 비해서 기록이 적은 렘브란트에 대해서 우리는 사실상 작품의 성격으로 그의 변화과정을 유추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성서나 전설에서 주제를 얻은 종교화나 역사화를 그리는 한편 자기 자신과 주위의 사람들, 가까운 가족들의 초상을 그림으로서 모델의 단순한 외형적인 면을 묘사하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감정의 표현이나 심리적인 면까지 추구해 나갔다. 이러한 그의 경향은 이국적인 변장이나 색다른 치장을 시도하는데서는 물론 전설이나 역사의 내용을 묘사한 그림에 있어서도 응용의 폭을 넓혀주었다.

    Rembrandt: Self-Portrait
    Self Portrait, 1629,
    oil on canvas, The Mauritshuis at The Hague

    25년 무렵부터 레이덴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친구 J.리벤스와 경쟁하며 강한 명암대비와 정교한 자연주의적 세부묘사를 한 이야기 그림을 그렸다. 31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그 곳에 정착했다. 1624년 레이덴으로 돌아와 이듬해부터 독립하여 아틀리에를 열었다. 32년까지 완전한 독학으로 친척, 이웃노인, 성서에서 소재를 얻어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Rembrandt,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
    The Anatomy Lecture of Dr. Nicolaes Tulp
    1632, Oil on canvas, 169,5 x 216,5 cm, Mauritshuis, The Hague

    암스테르담 외과의사회의 위촉으로 그린 《털프 박사의 해부학강의(The Anatomy Lesson of Dr.Nicolaes Tulp, 1632)》로 크게 호평을 받아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34년 명문의 딸 사스키아 판 오이렌부르흐와 결혼하였으며 당시의 미술세계시장이라고 할수 있는 암스테르담에서 첫째가는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을 얻었고 화가조합에 가입, 이어서 39년에는 시내에 저택을 구입했다.

    Rembrandt: Self-Portrait
    Self Portrait, 1629,
    panel, Pinakothek at Munich

    그는 수많은 초상화를 계속 그리는 한편 레이덴시대의 친구인 문인정치가 C.호이겐스의 추천으로 네덜란드 총독 프레드릭 헨드릭을 위해 《그리스도의 수난》 연작(連作)을 제작했다. G.플링크·F.볼 등 많은 제자를 양성한 이 시기의 작품에는 《아브라함의 희생》 《눈을 찌푸린 샘슨》 등 극적 순간의 격렬한 움직임과 얼마쯤 과장된 몸짓과 표정에 의한 감정의 표출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들은 렘브란트가 이탈리아 유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P.P.루벤스를 필두로 하는 당시의 국제적인 바로크 조류(潮流)에 아주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Rembrandt: Self-Portrait
    Self Portrait as a Young Man, 1634,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사실적인 네덜란드 풍경화 속에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는 일련의 독특하고 환상적인 풍경화 제작과 한평생의 취미였던 미술품·골동품 및 타국의 무구(武具)·의상 등 대규모 수집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그 후 약 10년 간은 생활이나 명성에 있어서도 가장 혜택받은 시기였다. 34년 명문가문의 딸 사스키아 판 오이렌부르흐와 혼인하여 당시의 세계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암스테르담에서 첫째 가는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얻어 많은 수입과 제자를 모았다. 그러나 그의 회화가 성숙해짐에 따라 당시 일반이 좋아하던 평판(平版)의 초상화 등에 만족하지 못해 외면적으로 정확한 묘사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인 것과, 깊은 인간성을 중요시해서 종교적 또는 신화적인 제재(題材)나 자화상(自畵像)이 많아졌다.

    Rembrandt: Self-Portrait
    Self-Portrait, mid 1630s,
    pen and brown ink, brown & gray wash,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그러나 그의 회화가 성숙해짐에 따라 외면적인 유사성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인 것, 인간성의 깊이를 그리고자 하는 욕망이 절실해지면서 종교적 또는 신화적 소재나 자화상의 작품이 많아졌다.
    따라서 42년 청신한 화풍의 [야경]을 제작, 발표하였으나, 일반인들이 그 예술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이 작품에서 그는 당시의 유행인 기념촬영적인 단체 초상화에서 벗어나 그의 독특한 명암의 효과에 의한 대담한 극적 구성을 사용했으나 일반인은 그 예술성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Self-portrait, 1640,Oil on canvas, 102 x 80 cm
    National Gallery, London

    16명의 사람들이 조금씩 돈을 거두어서 만들게 된 이 그림은 한 사람만을 그린 초상화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을 그린 집단 초상화이다. 렘브란트는 처음에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나열할까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자연스러운 모습을 만들기 위해 렘브란트는 마치 갑자기 사진을 찍힌 듯한 장면을 연출했다. 그래서 그림 속에서 앞에 있는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옆 모습만 나온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뒷모습만 보이거나 남의 팔이나 몸통에 가려서 얼굴의 반쪽만 나온 사람들도 있게 되었다. 게다가 그림은 전체적으로 어두웠을 뿐만아니라 사람들의 모습도 알아보기 쉽지 않게 선명하지 못했다. 반면에 아무 상관도 없는 한 소녀가 등장하여 그림 속의 누구보다도 밝은 빛을 받은 모습으로 강조되었다. 그러니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들은 같은 돈을 내고도 자기의 모습이 남보다 조그맣게 나와서 무척 화가 났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그림은 당시에 형편없는 그림으로 평가받았다. 그 이후 인기가 많았던 렘브란트에게 초상화를 주문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게 되었고, 결국 빚더미 위에 올라앉게 되었다. 물론 렘브란트가 이 그림을 단체 사진에서처럼 사람들을 한 줄로 늘어서게 그렸다면 평생 부자로 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Self-Portrait, 1658, Oil on canvas, 133,5 x 104 cm
    Frick Collection, New York

    그렇지만 만약 그랬다면 이 그림은 그저 평범한 그림으로서만 남게 되어 우리에게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이 그림이 아주 훌륭한 그림으로 인정 받고 있는 것은 렘브란트가 자기의 생각과 고집대로 여러 사람의 다양한 자세와 표정을 생동감 있게 그렸기 때문이다.

    Rembrandt: Self-Portrait
    Self Portrait, 1659,
    oil on canvas, The National Gallery of Art at Washington D.C.

    사실 암스테르담에는 몇몇유력한 시민들은 그에게 변치않은 친구이며 지지자여고, 그 또한 1650년대와 1660년대에 주요한 공공적인 대작을 몇몇 주문받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재정적인 곤란은 주로 재정관리의 미숙에서 오는 것이었다.

    Self-Portrait
    Self-Portrait, 1660,
    oil on canvas,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그의 예술은 시대를 초월한 것이었으며,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와 유럽 회화를 대표하는 최대의 화가였다. 종교·신화·초상·풍경·풍속·정물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작품은 현존되고 있는 것만도 약 600점의 회화, 300여 점의 에칭(etching)과 수천 점의 소묘가 있다. 그는 그 나름의 깊은 빛과 그늘을 창조하였다. 즉 그의 작품에 있어서 색이나 모양이 모두 빛 그 자체이며, 명암이야말로 생명의 흐름이었다. 루벤스가 장려 화려한 귀족적인 취미를 수립한데에 대해 종교적 소재에서도 렘브란트만큼 마리아나 그리스도의 모습을 네덜란드의 시정생활에서 구한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에 높은 종교적 정감과 깊은 인간 심정의 움직임이 표현되어 있는 것은 그 특유의 명암법 때문이다. 그의 마음 속에는 인간애 정신이 넘치고 있어, 그가 그리는 작품은 한없는 따뜻한 애정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는 자신의 비속한 용모 때문에 주변에서 경원을 당했고, 또 단정치 못한 옷차림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의 혐오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작업도중에 어떤 사람의 방문도 거절했다고 한다.


    Portrait of the Artist at His Easel, 1660, Oil on canvas, 111 x 90 cm
    Musée du Louvre, Paris

    렘브란트만큼 많은 자화상(약 100점)을 그린 사람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에 대하여 겸허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는 훌륭한 화가로서의 자신의 멋진 모습보다는, 몹시 어두운 배경 속에서 무엇인가 괴롭고 슬픔에 잠긴 듯한 찌그러진 인상의 자기 모습을 남겼다. 이처럼 렘브란트는 사람의 마음과 감정, 느낌, 생각 등을 뛰어나게 표현할 줄 아는 훌륭한 화가였다.

    이 화가는 자제심으로 뽈 때 다른 사람과 매우 정신구조가 달라고, 그 화풍도 자기 멋대로인 독창적인 화풍을 발전시켜다. 또 그는 한 작품을 완성시키는데 다른 화가들은 생각할 수 없는 만큼 더디고 끈기있는 노력을 했다.


    Self-Portrait, 1661, Oil on canvas, 114 x 94 cm
    English Heritage, Kenwood House, London

    그가 설혹 유화를 한 점도 그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에칭만으로도 유럽 회화사상 최대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을 수 있다. 에칭의 모든 기술은 렘브란트에 의해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화에는 독특한 수법이 쓰여졌고, 매우 장엄한 효과를 올린 걸작이 많다. 작풍은 대상에 대해서는 사실적이지만, 빛의 효과에 대해서는 최대의 이상주의자였고, 색채 및 명암의 대조를 강조함으로써 의도하는 회화적 효과를 올리는데 그 특색이 있다. 즉, 색이나 모양이 모두 그 빛 자체이며, 명암이야말로 생명의 흐름이었다. 오늘날 그를 가리켜[혼의 화가][명암의 화가]라고 일컫는다. 화려한 붓놀림, 풍부한 색채, 하늘에서 쏟아지는 듯한 빛과 어두움. 램브란트 그림의 마력은 명성을 누리던 젊은 시절보다 고독과 파산의 연속이었던 말년에 더욱 빛났다. 강렬한 힘과 내면을 꿰뚫는 통찰력, 종교적 권능을 감지하게 하는 탁월한 빛의 처리 기법은 미술사의 영원한 신비로 남아 있다. 높은 종교적 정감(情感)과, 인간심리의 움직임이 깊이 있게 표현된 그의 작품에는 따뜻한 애정이 스며 있다.


    Self-Portrait, 1669, Oil on canvas, 86 x 70.5 cm
    National Gallery, London


    그는 또한 성서적인 과거의 후예이며 , 박해에 대한 참을성있는희생자인 에 대해서 특벼한 동정을 품고있었다. 유대인들도 그의모델이 되어주었다.


    Self-Portrait, 1669, Oil on canvas, 59 x 51 cm
    Mauritshuis, The Hague

    아내와도 사별하고 실망과 곤궁에 빠졌으나, 그러나 이에 불구하고 온정열을 기울여 작품에 정진하는 한편, 아들 티투스의 성장과 그의 후반생의 좋은 반려자가 되어주는 동거하고 있던 고용인 헨드리케 스토펠스와의 재혼으로 환경은 더욱 원숙해졌다. 사스키아의 유아(遺兒) 티투스의 성장과, 45년경에 맞은 마음씨 착한 둘째 부인 헨드리키에의 내조는 그의 예술을 더욱 원숙하게 하여, 오늘날 대표작이라고 하는 대부분은 40년대 이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으며, 56년 파산선고를 받아 일찍이 사스키아와의 행복한 생활을 위해 구입한 저택도, 예술적 영감을 한없이 자극하던 여러 가지 미술품도 모두 그의 손에서 떠나게 되었다. 62년에는 헨드리키에가 세상을 떠나고, 68년 티투스마저 죽자, 그도 이듬해 10월 유대인 구역의 초라한 집에서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죽었다. 그는 파산선고를 받고, 둘째 부인 헨드리케와 자식 티투스마저 죽은 뒤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유대인 지역의 초라한 집에서 죽었으나, 죽은 지 100년도 지나지 않아 그의 위대한 예술성이 입증되었다. 작품으로 《사스키아 반 오이렌부르흐의 초상》 《헨드리케 스토펠스의 초상》《엠마오외 그리스도》 《야곱의 축복》 《유대인 신부》 《성가족(聖家族)》 《다에나》 《병자(病者)를 고치는 그리스도》 《3그루의 나무》 등 현존하는 작품은 유화 약 600점, 에칭 300여점, 소묘 천 수백점 등이 있다.


    렘브란트 작품의 특징 / 위키백과

    렘브란트의 그림의 특징은 시대의 관행을 뛰어넘어, 개성을 발휘했다는데 있다. 이를테면 야경의 경우 얼굴이 모두 나온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그림도 있는데, 이는 모두 얼굴이 나오게 하는 단체 인물화가들의 관행을 뛰어넘은 것이다. 성서를 주제로 한 성화들도 성화상 작가처럼 거룩하고 화려한 묘사가 아닌, 인물들의 심리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특징이다. 이를테면 구약성서, 족장설화, 중 하나인 아브라함이 첩 하갈과의 사이에서 낳은 큰 아들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를 버리는 장면을 그림으로 묘사하면서, 아브라함의 고뇌와 정실부인인 사라의 뿌듯함을 대비시키고 있다.


    렘브란트 연대표

    1606년 7월 15일 네덜란드의 라이덴 시에서 출생. 헤이그 북방에 있는 라이덴은 운하가 종횡하고 흐르며,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이 많고, 대학, 천문 관측소, 박물관은 유명하다. 양친은 비교적 완고한 편이어서 렘브란트를 화가보다는 학자로 키우기 위해 라틴어 학교에 보낸다.
    1620년(14세) 라틴어 학교에서 7년 동안 수학하고, 5월 20일 라이덴 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대학 학과에는 흥미를 갖지 못한 채, 화가가 되기 위해 대학을 그만둔다. 이 해 라이덴의 화가 소와넨브르흐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그림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함.
    1624년(18세) 암스테르담의 역사 화가 라스트만에게 6개월 동안 사사하다가 라이덴의 집으로 돌아옴.
    1625년(19세) 제작 연도를 넣은 최초의 작품 〈성 스테판의 순교〉를 제작.
    1626년(20세) 리펜스와 공동으로 마련한 아틀리에에서 작업. 최초의 애칭 작품〈해체〉,<이집트에의 도피〉를 제작했는데, 활예란유태인들 사이에서 시행해 온 습관적인 의식으로, 사내가 출생하면 여드레 만에 자지 끝에 살가죽을 조금 끊어내는 풍습임. 애급인,아라비안인 등 원시 민족 사이에서 성행했고, 특히 유태인은 이것을 신이 민족에게 명한 신성한 행위며 선민으로서의 특징으로 믿었음. 〈천사 앞에서 뒷걸음치는 발람의 당나귀〉제작.
    1628년(22세) 2월, 렘브란트 첫 제자로 15세 소년 도우를 받아들임. 에칭 작품 〈어머니의 초상〉제작. 〈베드로의 부인〉,〈토론하는 두 철학자〉제작.
    1629년(23세) 이 해, 네덜란드의 작가 하이헨스가 「자전」을 썼는데, 그 가운데 네덜란드의 유명 화가로 젊은 렘브란트를 거론한 것으로 보아, 이때 이미 화가로서의 기반을 닦은 것으로 보임. 〈은화 30냥을 갚은 유다〉, 〈자화상〉제작.
    1630년(24세) 부친 사망. 이 해, 에칭으로 여러 표정을 담은 여러 장의 자화상을 제작. <예루살렘의 파괴를 한탄하는 예언자 예레미아〉제작.
    1631년(25세) 이때부터 암스테르담의 화상 에이렌블르프와 친해지는데 연말에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사, 이 화상의 집에서 기식한다. 〈여자 예언자 한나〉 제작, 이 예언자는 렘브란트의 어머니라 함.
    1632년(26세) 이 해부터 다음 해까지 50점의 작품을 제작. 그런데 4점 이외는 전부 주문을 받은 초상화로서 그의 인기를 엿볼 수 있고, 그의 생애 중 가장 다작한 해임. 최초의 집단 초상화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수염이 있는 남자의 초상〉제작.
    1633년(27세) 6월 8일 사스키아와 약혼. 은필 소묘 〈밀짚모자를 쓴 사스키아〉를 약혼 기념으로 그림. 이때부터 〈수난〉연작 제작에 착수. 〈조선가와 그의 아내〉등 제작.
    1634년(28세) 6월 22일, 22세의 사스키아와 결혼. 이 해부터 많은 제자들이 렘브란트의 아틀 리에에 모임. 에칭 작품 〈사스키아〉제작.
    1635년(29세) 12월 5일 첫아들을 낳았으나 2개월 후 사망. 이때부터 미술품 경매소에 자주 들러 미술 골동품 등을 매입하기 시작함. 〈아브라함의 희생〉, 〈가니메데스의 납 치〉등 제작.
    1636년(30세) 하이헨스에게 보낸 7통의 편지 중 이 해에 2통을 썼는데, 첫 편지에 〈그리스도의 승천〉을 끝냈다고 적었음. 렘브란트는 이 해부터 1638년까지 초상화 제작에 격감하고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관리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장면이 있는 〈풍경〉, <장님이 되는 삼손〉등 제작.
    1638년(32세) 렘브란트는 그들 부부가 사스키아 부친의 유산을 낭비했다는 처족들의 비난에 분개, 변호사를 통해 명예 훼손으로 고소. 그즈음 렘브란트는 처가의 돈을 쓸 필요없 이 많은 돈을 벌어 놓았다고 공언. 〈삼손의 혼례식〉, 에칭 작품〈아담과 이브〉제작.
    1639년(33세) 1월 5일 암스테르담 시에서 손꼽히는 저택을 매입, 전가족이 이주. 대금의 4분의 1은 1년 이내에, 나머지는 5∼6년 사이에 분할 지불하기로 계약. 하이헨스에게 보낸 나머지 5통의 편지는 이 해에 쓴 것임. 미술품 경매소에서 라파엘로가 그린 초상화를 스케치. 〈그리스도의 부활〉완성.
    1640년(34세) 모친 사망.
    1641년(35세) 오르네루스의 「라이덴 시의 기록」출판됨. 이 책에는 렘브란트의 전기도 실려 있음. 9월 22일, 렘브란트의 유일한 생존 혈육인 넷째 아들 티투스, 세례를 받음. 이 해 에칭으로 수 점의 풍경화를 그림. 〈메노파 설교 안슬로와 그의 처〉를 제작.
    1642년(36세) 6월 14일, 아내 사스키아 사망. 이 해 그의 대표적 걸작 〈야경〉제작. 〈환자를 고치는 그리스도〉제작에 착수. 제자들은 더 많이 모여들고 나중에 유명한 화가도 배출됨.
    1643년(37세) 가정부로 헤르트헤 디르크 고용, 얼마 동안 부부 생활을 하는데, 불행의 씨앗이 됨. 에칭 작품〈나무 셋〉제작.
    1645년(39세) 천사와 함께 있는 〈섬 가족〉, 〈창가에 앉은 소녀〉제작.
    1646년(40세) 액자와 커튼이 있는 〈섬 가족〉, 소묘〈설교사 세빌리우스〉제작.
    1647년(41세) 에칭 작품〈얀 시크스 상〉, 소묘〈레넹 시의 서문〉제작.
    1648년(42세) 가정부로 들어온 헤르트헤 유언장을 작성, 그녀의 초상화만 빼고 모두 렘프란 트와 사스키아 사이에서 난 아들 티투스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 주도록 기재. 〈에마오의 그리스도〉제작.
    1649년(43세) 헨드리키에 스토펠스, 렘프란트 가의 새 가정부로 들어옴. 렘프란트의 애정이 헤르트헤에서 새 가정부로 옮겨지고, 이로 인한 가정 불화가 날로 심해짐. 마침내 헤르트헤가 혼인 불이행의 소송을 걸어 재판을 받았는데, 매년 별거 수당을 지불하도록 판결.
    1650년(44세) 렘브란트는 헤르트헤를 복수하기 위해 그녀가 음녀였다는 소문을 수집, 이를 공증시켜 그녀를 끝내 형무소로 보낸다. 헤르트헤는 친구들의 탄원으로 5년 후에 석방되었으나, 그 1년 후에 사망한다.
    1653년(47세) 렘브란트, 경제적인 파탄 시작됨. 14년 전 집을 살 때 진 빚과 이자의 반제 요청을 받고 백방으로 돈을 마련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이탈리아 사람에게서 주문받은 〈호메로스의 흉상을 응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에칭 작품 〈3개의 십자가〉제작.
    1654년(48세) 포르투칼의 상인이 주문한 〈7년의 초상화〉가 모델과 틀리다는 이유로 그림값 지불을 거부하자 렘브란트는 화가 조합에 조정을 요청, 보필이 끝나는대로 화료를 전액 받기로 합의. 그런데 이 사이에 이 그림이 없어졌다. 당국은 내연의 처 헨드리키에를 두 번이나 소환했으나 불응. 이런 일이 있은 후 개신파 교회 사문위는 헨드리키에와 렘브란트와의 정당치 못한 관계를 힐문, 그녀의 성찬 출석을 거부했다. 이북새통에서 헨드리키에와 렘브란트 사이에서 딸 코르넬리아가 출생한다. 소묘〈인도의 유작〉제작.
    1655년(49세) 〈책상에 앉은 티투스〉, 〈도살된 소〉, 소묘〈창에서 밖을 내다보는 여인〉제작.
    1656년(50세) 7월 25일∼26일 렘브란트는 당국에 재산관리를 신청, 재판소에서 재산 목록을 작성, 〈요셉의 아들을 축복하는 야곱〉, 〈데이만 박사의 해부학 강의〉제작.
    1657년(51세) 12월 렘브란트의 재산 첫 공매 실시.
    1658년(52세) 렘브란트의 저택, 경매에 붙여짐. 그러나 2년 동안은 이 집에서 살 수 있게 됨.
    1660년(54세) 이 해 늦게, 렘브란트 일가는 로렌블랑트로 이사. 12월 15일, 동서 생활하는 헨드리키에와 아들 티투스 공동 명의로 미술품 취급회사를 설립, 렘브란트는 고용인 형식으로 제작한 작품 일체르르 이 회사에 양도.
    1661년(55세) 8월 7일 헨드리키에 유언장을 작성. 암스테르담 시의 주문화 〈그로티우스 큐리스의 강의〉제작. 그리고 〈두 흑인〉, 〈사도 바울로 분장한 렘브란트〉를 제작.
    1662년(56세) 〈포지 조합의 견본 조사관들〉제작.
    1663년(57세) 헨드리키에 사망. 〈호메로스〉제작.
    1665년(59세) 아들 티투스의 권리가 인정되어 렘브란트의 재산 경매금 가운데 일부를 아들 이 받음.
    1668년(62세) 2월 10일, 아들 티투스 결혼. 그러나 얼마 후 사망.
    1669년(63세) 죽은 아들 티투스의 처는 5월 유복녀를 낳는다. 10월 4일 렘브란트 사망.
    작품은 유화 약 600점, 에칭 300여점, 소묘 천 수백점 등이 있다.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http://www.21netart.com/profile/rembrandt/Rembrandt
출처 : ★아름다운 미술관★
글쓴이 : 정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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