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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겸재 정선 (謙齋 鄭敾 1676-1759)

또하나의세상2 2008. 5. 16. 00:10

 

      겸재 정선 (謙齋 鄭敾 1676-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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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개인 인왕산을 그리다  (인왕제색도 仁王霽色圖)

 

1751년, 국보 216호 비단에 묵과 엷은 채색, 138.2 x 79.2 cm, 호암미술관 소장


겸재 그림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 현재 서울 청와대 언저리 궁정동 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소나기가 막 그치고 천지를 감도는 비 비린내 가득한 안개를 피워 올리는 풍광을 옮긴 대작으로, 희끄무레한 바위산이 저리도 거무튀튀한 까닭이다. 그림에 적힌 관지(款識)가 신미윤월하완(辛未閏月下浣), 신미년 윤달 5월 하순.

바위산 골골이 물이 흘러내리고 오른편 아래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집 한 채가 보인다. 누구 집일까? 겸재의 60년 지기인 사천 이병연(1671-1751)의 집(취록헌)이다. 겸재 나이 일흔 다섯, 피붙이와 다름없었던 사천이 죽기 나흘 전에 그렸다는 그림으로 겸재가 조선 후기 진경산수의 거장이었다면 사천은 만 삼천 수가 넘는 시를 지은 시인으로 서로 시와 그림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사이였다. 이렇게 주고 받은 시와 그림을 한데 묶은 것이 당시 한양과 주변 풍경이 담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


현재 종로구 옥인동 부근으로 겸재가 살던 집
“뒷산을 배경으로 한 한적한 곳에 초당이나 정자를 짓고 뜰에는 오동나무나 버드나무를 배치한 그림은 명대 오파의 문인화가들, 특히 심주(沈周)가 즐겨 택한 소재의 하나이다. 이 그림은 기본적으로 이런 구도를 보이며 그림 전체의 분위기 또한 문인화가 지향하는 것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겸재는 이를 단순히 모방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으로 소화하고 있다. 배경의 뒷산은 그가 자주 쓰던 찰법(擦法)과 미점법(米點法)으로 표현하고 오동나무와 버드나무의 수지법(樹枝法)에는 그의 힘찬 필치가 드러난다. 더욱이 나즈막한 뒷산은 조금도 과장됨 없는 우리나라 산의 모습을 보여주어 이 인곡(仁谷)은 정형산수의 본(本)이 아닌 현장감(現場感)을 느끼게 한다.”



 

인곡정사(仁谷精舍) 인왕산 아래 있던 겸재의 집

 


 

삼승정(三勝亭)

춘재 이중희의 정자로 현재 사직동 주변


 

청송정(聽松堂)


조선 중기의 큰 선비 청송 성수침의 독서당


 

자하동(紫霞洞)


현재 종로구 청운동 부근


 

창의문(彰義門)


 

풍계유택(楓溪遺宅)


현재 북악산 아래 유란동 근처로 겸재의 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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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계(淸風溪) 1


인왕산 동쪽 기슭으로 현재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
병자호란 때 순국한 우의정 선원 김상용의 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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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계(淸風溪) 2


 

석실서원(石室書院)


현재 경기도 미금시 수석동 부근으로 김상헌의 묘소가 있던 곳


 

광진(廣津)


현재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 일대로 워커힐 주변


 

압구정(鴨鷗亭)


세조 때 공신 한명회의 별장으로 현재 강남구 압구정동


 

양화진(楊花津)


현재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이수정(二水亭)


현재 강서구 염창동 도당산 꼭대기에 있던 정자


 

소요정(逍遙亭)


현재 양천구 가양동 주변


 

소악루(小岳樓)


현재 강서구 가양동 성산 기슭에 있던 누각


 

귀래정(歸來亭)


죽소 김광욱이 행주 덕양산 기슭에 지은 정자


 

낙건정(樂健亭)


현재 행주대교 근처 고양시 덕양구 덕양산 자락에 있던 정자


 

개화사(開花寺)


현재 강서구 개화동 개화산 약사사


 

동작진(銅雀津)


현재 동작대교가 있는 동작나루



 

구룡폭(九龍瀑), 23.5 x 29.5 cm


 

낙조장류(落照藏柳), 23.5 x 29.5 cm


 

부자묘로회(夫子廟老檜), 23.5 x 29.5 cm

 


 

함흥본궁송(咸興本宮松), 23.5 x 29.5 cm


“조선 초 이성계가 거주했던 함경도 함흥의 궁궐에 있는 소나무를 독특한 구도로 배치한 작품.
나무에 푸른색을 입히고 그 안에 소나무 가지를 그리는 방법은 겸재 특유의 화법이다.”


 

초당춘수(艸堂春睡), 23.5 x 29.5 cm


 

야수소서(夜授素書), 23.5 x 29.5 cm


“중국 진나라의 병법가인 황석공이 장량에게 소서를 전수했다는 고서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겸재는 전통적인 주제를 다룬 고사 인물도도 많이 그렸다.”


 

涪江(부강), 23.5 x 29.5 cm

 


 

기려심춘(騎驢尋春), 23.5 x 29.5 cm


“나귀를 타고 봄을 찾아 떠난다는 뜻. 이른 봄이 되면 깊은 산속에 가장 먼저 핀 매화를

찾아 떠났다는 맹영광의 고사를 표현했다.”


 

화표주(華表柱), 23.5 x 29.5 cm


“화표주는 무덤에 세우는 돌기둥을 말한다. 달밤에 높고 가파른 절벽 위에 있는

고고한 학의 모습을 그렸다.”


 

 

금강전도(金剛全圖), 1734


종이에 엷은 채색, 94.1 x 130.6 cm, 호암미술관 소장





 

“개성 북쪽 천마산 자락 오조천 상류에 걸린 박연폭포. 폭포 밑의 소(沼) 고모담.
박연은 폭포 위에 있는 바가지를 닮은 소를 말한다. 37미터.”


 

 

박연폭(朴淵瀑)


비단에 수묵, 52.2 x 119.5 cm, 이우복 소장



 

낙산사(洛山寺)



 

겸재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독서여가(讀書餘暇)

돌림담배 [2006-11-26 01:59:41]


겸재 정선은 너무나 유명하여 여러분들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당시 중국풍의 그림을 답습하던 화가들의 관념적인 그림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직접 답사하고 표현함으로써 진경산수라는 장르를 개척한 화가가 바로 정선입니다. 정선은 산수화 뿐만 아니라 화조화(꽃과 동물들을 그린 그림)도 간혹 그렸습니다.

옆에 있는 그림은 정선의 금강산 전도입니다. 금강산 전도는 인왕산 제색도와 박연폭포와 더불어 정선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선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과연 이 그림이 조선시대의 그림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분인 정선의 일생과 작품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정선은 조영석과 마찬가지로 양반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몰락한 양반의 자손으로 태어난 정선의 집안 형편은 그리 넉넉한 편이 못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그림솜씨는 주변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안동김씨의 후원으로 벼슬길에 오르게 되며, 81세 때는 종2품의 높은 벼슬을 하게 됩니다. 당시 조선사회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천박하게 취급했고 양반출신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대하여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선은 그림에 대한 열정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기에 이러한 시선에 개의치 않고 그림을 그렸으며 그 결과 지금까지 칭송받는 화가로 남게 됩니다. 한번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정술조라는 신하가 임금님(영조)에게 정선을 쫓아내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오히려 임금님은 정술조를 파직시켜 버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정선은 1676년 1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정선은 성품이 너그럽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효자였습니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으나 열심히 공부하여 학문에 대한 지식이 매우 깊었다고 합니다. 당시 김창흡이라는 스승 밑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정선은 14세 되던 해 공교롭게도 자신의 생일날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고 스승마저 낙향을 하게 되어 아버지와 스승을 모두 잃게 됩니다.

아버지와 스승을 한꺼번에 잃은 정선은 출세의 길을 버리고 그림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선은 30대에 금강산을 2번에 걸쳐 다녀오게 되는데 첫 번째 금강산 여행에서 <신묘년(1711) 풍악도첩>이라는 화첩을 남기게 되는데 이 그림들이 지금까지 알려진 정선의 그림 중에서 가장 이른 것이라고 합니다. 금강산에 심취한 정선은 이듬해 또 한번 금강산 여행을 떠납니다. 이때 유명한 <해악전신첩>을 그리게 됩니다. 이 그림은 당시 굉장한 작품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그림들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이때부터 정선의 이름은 유명하게 되었으나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두자식을 돌보아야 하는 정선으로서는 관직이 없어 매우 궁핍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좌의정 김창집은 정선에게 세자익위사라는 벼슬을 갖게 해줍니다. 세작익위사라는 직책은 왕세자의 경호원 역할을 하는 직책으로 드라마에서 보면 왕세자가 행차를 할 때 딱딱이를 치며 “길을 비켜라”고 소리지르며 호위하는 그런 직책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화가가 길을 비켜라 소리지르는 모습을 떠올리면 측은한 마음도 듭니다. 이리하여 정선은 월급을 받으며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후 정선의 직책은 계속 상승하여 노년에는 81세까지 명예직이기는 하지만 계속 벼슬(종2품)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정선의 말년은 다른 화가들에 비해서 대단히 안정적이었으며, 제자들을 많이 양성하였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심사정 같은 화가들이 있고 정선에게 <주역>을 배운 학자들도 있었으니, 정선은 그림뿐 아니라 학문에도 매우 깊은 지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평생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붓을 놓지 않았던 정선은 그후 일취월장하게 되어 조선시대 회화에서 길이 남을 명작들을 남기게 되며, 8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금강산 그림은 이전에도 많이 그려졌지만 실제 금강산을 모티브로 조선 산수화를 정형화한 것은 시작도 끝도 겸재 정선의 몫이었습니다. 그가 1711년 처음 금강산에 갔다 온 뒤 그린 ‘신묘년 풍악도첩’의 그림들은 헬기를 타고 아래를 내려다 본 것 같은 부감법(俯瞰法)에 의한 시각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로봉·혈망봉·월출봉 하는 식으로 봉우리마다 이름도 써놨지요. 그러다가 이것을 더욱 세련되게 하고 중국의 화법들을 자기화해 59세때(1734년) ‘금강전도’를 그리는데 같은 작가가 그린 그림이라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경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동주 이용희 선생이 진경산수와 실경산수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지요. 실경은 있는 것을 사진 찍듯이 그린 거라면 진경산수는 그 산에서 봤던 감동까지 회화로 옮겨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화가들은 실경에 얽매여 정작 좋은 진경산수를 그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정선과 금강산에 동행했던 시인 사천 이병연의 얘기를 들으면 그는 금강산을 그리기 위해 갔으면서도 붓은 하나도 안가지고 있었다고 해요. 가슴 속에 진경을 담아서 화폭에 펼쳐낸 것, 아마 이 점이 좋은 진경산수를 그리는 요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몰락한 양반출신의 선비화가인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우위를 비교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60세 무렵에 죽은 것으로 보이는 김홍도와 달리 정선은 60세가 될 때 비로소 진경산수의 경지에 오른 뒤 이후 84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노필(老筆)로 무르익은 그림들을 그리는 게 특징이에요. 낙관 자체를 겸재 노인이란 뜻으로 겸로(謙老)라고 한 ‘정양사도’를 보면 근경의 정양사와 원경의 일만 이천 봉우리가 대비되면서 사실상 ‘금강전도’가 됐습니다. 섬세하고 치밀힌 필치를 보여주는 중년과 달리 노년으로 갈수록 정수만 묘사하고 색채도 밝은 것 몇가지만 사용하지만 원숙한 경지와 함께 중년의 작품을 능가하는 감동을 주지요.

사실 저는 정선이 젊은 시절부터 천재성을 보여준 김홍도처럼 타고난 화가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갈고 닦고 훈련하고 자기의 혼을 집어넣어 환갑이 됐을 때 자기 형식을 만들어낸 뒤 다시 20년 동안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해 원숙한 그림을 그려낸 대기만성의 모습이 그에 대한 존경심을 더 낳게 하는 것이지요. 먹의 번지기 등이 막 그린 것처럼 보여도 디테일이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정선 그림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겸재의 ‘구학첩(丘壑帖)’에 부친 발문에서 “새로운 화법을 창출해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이 한결같은 방식으로 그리는 병폐와 누습을 씻어버리니, 조선적인 산수화법은 겸재에서 비로소 새롭게 출발하게 된 것이다”라고 평한 조영석의 찬사가 그의 그림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산수를 그리는데 다양성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무색케 하는 ‘노백도’ ‘함흥본궁도’ 등의 소나무 그림과 70대 중반에 그렸을 것으로 보이는 ‘인왕제색도’와 ‘박연폭포’는 정선의 원숙한 기량이 십분 발휘된 대표작입니다.

현재 심사정(1707-1769)은 정선의 제자라고 했지만 그를 하나도 배우지 않고 자기 나름의 세계를 개척한 분인데 참 불우했어요.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만사 심지원의 증손으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 심익창이 과거부정 사건과 왕세제였던 연잉군(후에 영조) 시해 미수사건에 연루되면서 명문가에서 하루 아침에 패륜가에 대역죄인의 집안이 돼버렸기 때문입니다.

출세를 할 길은 막혔지만 그림 재주가 있어 이로 이름을 남겼는데 자신의 처지처럼 어두운 분위기에 애잔한 그림을 많이 남겼지요. ‘강상야박도’ 같은 산수화나 ‘파초와 잠자리’ ‘딱따구리’ 등의 화조·조충도 등이 모두 이런 분위기를 전합니다. 심사정의 그림을 모화사상에 젖어 있다고 하며 폄하한 때도 있었지만 세계적인 수준에서 봤을 때 심사정처럼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한 화가가 있었다는 것이 18세기 우리 조선 화단이 갖고 있었던 건강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능호관 이인상(1710-1760)은 당대의 명문 중 명문인 전주이씨 밀성군파로 백강 이경여의 현손이었지만 증조부가 서출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조부인 이경여가 노론에서 알아주는 선비였기 때문에 이인상은 당대 일류 문인들과 교유할 수 있었지요. 43세때 음죽 현감을 그만둔 뒤 단양에 은거하려다 노친의 반대 때문에 지금의 장호원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눈 덮인 낙랑장송을 그린 ‘설송도’를 보면 그림이 담박하고 고아할 뿐만 아니라 기교는 조금도 강조되지 않는 묘한 인상을 풍깁니다. 선비 그림의 본도(本道)는 그림에 기량·솜씨가 보이면 속하고 천하다고 봤습니다. 따라서 그림에 능하면서도 절대 기교가 능하지 않은 인상을 줘야 하는 것이지요. 문인화가 화풍이 아니면서 문인화의 경지를 완전히 자기 삶 속에서 녹여서 만들어낸 것이 이인상이었다고 보입니다. 최고의 높은 경지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호생관 최북(1712-1786)은 당대의 기인으로 ‘공산무인도’와 ‘풍설야귀인’처럼 기이하고 개성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지요. 중인 출신으로 자신의 이름인 북녘 북(北)자를 둘로 쪼개서 칠칠(七七)을 자로 삼아 스스로 ‘칠칠’이라고 했던 그는 술을 많이 마시고 성격이 모질어 싸움도 자주 했습니다.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란 뜻의 호생관(毫生館)이란 호를 스스로 지은 그는 말 그대로 그림을 팔아먹고 사느라 작품을 남발했어요. 그러나 그림을 모르는 사람이 그림을 사러오면 팔지 않는 등 그의 비위를 맞추기도 참 힘들었습니다. 어느날 한 귀인(貴人)이 부탁한 그림을 그려주지 않는다고 최북을 협박하자 자기 문갑 위에 있는 필통에서 송곳을 꺼내 한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돋보기 안경도 한 알만 사서 끼고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여행하고 만주벌 너머 흑룡강까지 들어갔다 오는 등 수수께끼 같은 행적을 보인 그는 어느 겨울날 술에 취해 돌아오는 길에 성벽 아래에서 잠들었다가 폭설이 내려 그만 얼어죽고 말았어요. 도저히 세상이 갖고 있는 룰 속에 못들어간 것이 그의 인생이었지만, 미술사에서 이런 분이 있었기 때문에 재미도 있고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겸재 정선, 감동 녹아있는 풍경화 ‘진경산수’ 완성
유홍준 특설강좌-화인열전(2)

 

돌림담배 [2006-11-26 02:00:09]
[논쟁] 진경산수화는 정녕 우리 것인가

간송학파 조선적 평가에 “진경시대 없다” “조선중화주의의 덫” 주장 나와


중국화풍에서 벗어난 ‘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 진경산수화를 필두로 문화예술 전반에서 조선적인 것이 부흥한 ‘조선후기 르네상스’ 진경시대(眞景時代:1675-1800)! 최근 ‘진경시대라는 용어는 오류다’ ‘간송학파는 진경시대를 오해·과장하고 있다’라는 주장이 공개적으로 제기돼 미술계 안팎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진경시대를 쟁점화시킨 주인공은 미술사 학자 이성미 한국정신문화원 교수와 유홍준 영남대 미술사학과 교수다. 이 교수는 한국미술사학회 학회지인 <미술사학연구> 227호에 실은 서평식 논문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에서 ‘진경시대 용어 오류’를 파천황적으로 제기했다.

그동안 학계에서 비공식적으로 이 용어의 문제점을 지적한 적은 있으나 논문을 통해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교수의 논문은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과 정옥자 서울대 교수 등 일명 간송학파 10여 명이 공동집필한 책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돌베게·1998)에 대한 서평식 논문이다.

이 교수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는 “책 보면 잘 나왔는데 굳이 인터뷰까지 할 필요성이 없는 것 같다”며 정중하게 거절하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론적으로 잘 썼기 때문에 간송학파를 비롯해 ‘진경시대 용어가 잘못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잘 수긍할 것이다. 진경시대 용어 오류에 대한 미술계 안팎의 여론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지만 아직은 ‘미술사학’ 차원의 서평식 논문이다 보니 역사학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연구’라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진경시대 논쟁’은 아직 미술·역사·국문학계 등을 비롯해 학계 전반에서 전면적으로 벌어진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전공인 미술사학 측면에 국한된 문제제기 수준으로 이해해달라는 주문이다. 하지만 이 교수가 논문에서 공개적으로 밝힌 내용은 ‘진경시대란 없다’라는 파격적인 주장이다.

우선 이 교수는 진경산수화는 18세기 들어 현격하게 증가한 산수화의 ‘한’ 장르 유형인데 그 용어로 조선후기를 ‘진경시대’라고 명명할 만큼의 비중이 될지가 큰 의문이라고 말한다. “진경산수화가 당시의 산수화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총 195점 가운데 52점으로 전체의 약 27%에 불과했다.”

진경산수화라는 일부 산수화에 국한된 용어를 “‘고유색의 발현’ 이라는 문구를 쓰면서 진경시대라는 용어를 문화 전반의 현상으로 합리화” 한 간송학파의 관점은 지나친 ‘확대해석의 오류’라는 지적이다. 때문에 이 교수는 진경산수화만을 근거로 진경시대라는 개념을 인정할 경우 “고려시대의 탈중국적 경향의 불교조각, 상감이라는 독특한 기법으로 창안해낸 고려청자는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이 교수는 간송미술관 최완수 실장이 붙인 진경시대라는 이름도 문화사적 시대 구분 용어로 사용하는 데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고 비판한다.

최 실장은 진경시대 125년간 중 숙종과 경종 간의 50년(1675-1724)을 진경시대 초창기로, 영조 재위 51년간(1724-1776)을 절정기로, 정조 재위 기간(1776-1800)을 쇠퇴기로 보았다. 하지만 이 교수는 영조대보다 정조대의 문화가 더욱 융성했으므로 정조대를 쇠퇴기로 보는 것은 어불설성이라며 최 실장의 이러한 잘못은 기본적으로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 숙종2-영조35)이라는 한 인물에 너무 초점을 맞춘 탓에 초래되었다고 지적한다.

이밖에 풍수지리설을 도입해 정선의 북악산 및 청운동 탄생설 등을 신비화하고 논문 문체도 과거형이 아니라 소설처럼 현재형으로써 학문적 엄격함을 지키지 못한 것이 최 실장의 오류라고 꼬집는다.


진경산수라는 용어는 1969년 고(故) 이동주 교수의 <겸재 일파의 진경산수>(아세아)에서 나왔으나, 진경시대라는 용어는 최 실장이 1985년 간송미술관에서 펴낸 학술지 〈간송문화〉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간송학파라는 미술사학 연구집단으로부터 나온 진경시대는 최근 들어 역사·국문학계, 언론을 비롯해 일반인들까지 당연한 용어처럼 쓰고 있다.

흔히 진경산수화는 중국풍의 그림을 답습하던 종래 화가들의 관념산수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산천을 조선적·사실적으로 그린 조선의 산수화를 뜻한다. 겸재가 창시해 1734년 <금강전도(金剛全圖)〉를 그려 완성했다. 이는 간송학파·안휘준·이태호·유홍준 교수를 비롯해 많은 학자가 ‘진경산수는 중국베끼기에서 벗어난 조선 고유의 주체적 그림’임을 동의한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영남대 미술사학과 유홍준 교수는 “진경산수의 사회적 배경은 조선 후기 숙종·영조 연간에 일어난 사회문화예술 전반의 사조와 맥을 같이한다”며 “사상에서 실학의 대두, 문학에서 한글소설·판소리 등장과 사설시조의 유행, 그림에서 현실을 소재로 담은 속화(俗畵)의 탄생과 더불어 그 모두를 ‘리얼리즘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최근 유 교수는 <화인열전>(2001년 3월 31 펴냄)에서 “진경 산수를 다른 각도에서 보는 두 가지 견해가 대두되었다. 이 두 학설은 모두 진경시대에 대한 적지 않은 과장과 오해를 하고있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하나는 최완수·유봉학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 등을 비롯한 이른바 간송학파다. 또 하나는 진경산수는 명나라 때의 <황산도(黃山圖)〉 같은 사경산수(寫景山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홍선표, 한정희, 고연희 등 홍익대 출신 중견·신진 학자들이다.

우선 유 교수는 간송학파가 겸재의 진경산수를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에서 완성된 조선성리학의 적통을 이어받은 우암(尤庵)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론(老論)의 정치적 이념이 구현된 산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조선중화주의의 덫’에 빠져있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우암 송시열 이래의 조선중화주의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명나라가 청에 의해 멸망하자 노론의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율곡 학파가 청에 대한 적개심으로 효종과 더불어 북벌론을 주장한, 정확히 말해서 숭명배청(崇明排淸)론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곡 이래 서인·노론의 문화적 계보가 진경산수를 낳았다는 간송학파의 입장은 너무 노론의 입장만 강조한 결과론적 추적이라는 것이 유 교수의 입장이다.

또 유 교수는 “율곡의 조선성리학(이기일원론), 송강 정철의 한글가사문학, 최립의 한국한문학, 석봉 한호의 조선고유서체 등 선조시대의 문화적 성숙기, 이른바 16세기 말 목릉성세(穆陵盛世)의 문화와 임진·병자 양란을 거쳐 100년 이상이 지난 영·정조 시대의 진경문화를 하나의 단일한 문화현상으로 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무리다” 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유 교수는 ‘진경시대는 없다’ ‘진경시대라는 용어는 폐기처분해야 한다’라는 한국미술사학회 이성미 교수의 입장에는 반대하지만 ‘진경산수를 조선중화주의의 산물’로 바라보는 간송학파의 견해와 확연히 갈라진다.

진경산수는 율곡학파가 추구한 조선 고유색의 결과라기보다 병자호란 이후 국제적 질서의 변화 속에서 생긴 새로운 문화적 자각의 결과라는 것이다. 유 교수는 진경산수화 를 ‘조선의 자생미학’이라고 하고, 간송학파는 순도 백의 조선 것이 아니라 명나라를 위시한 한족의 중국 것을 ‘새롭게 조선화’한 것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편 홍익대 출신 학자들은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조선 성리학의 산물이라는 견해에 강한 의문을 보내면서, 이와 반대로 겸재 역시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유 교수나 간송학파와 입장을 달리하면서 진경시대 그 자체를 부정하는 이성미 교수의 입장과는 일맥상통하는 셈이다.

하지만 유 교수는 “이러한 연구들은 겸재의 진경산수를 동아시아적 입장에서 살펴본다는 신선한 시각을 제공하지만 우리는 왕왕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나머지 한 시대, 한 인간이 쏟은 예술적 노력과 성과를 몰개성으로 몰아가는 과오를 범한다”며 홍익대 학파를 비판한다.

때문에 유 교수는 “진경산수는 이전의 명나라의 사경산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한편으로 중국 남종화(南宗畵)의 예술적 성취를 받아들임으로써 한 차원 높은 민족적 예술로 승화시킨 조선의 자생미학’이라는 이동주·최순우·안휘준의 주장은 그대로 유효하다” 강조한다.


작품분석·제작기법 연구에 치중한 국립박물관학파, 회화사를 문헌해석으로 연구하는 최완수 실장의 간송학파, 민중정신과 리얼리즘을 중시하는 유홍준 교수 등 민족예술총연합 산하 민족미술협의회학파, 홍익대학파. 지금 미술계는 이들 중 한 학파만 불씨를 던지면 ‘진경시대 오류논쟁’은 활화산처럼 타오를 분위기다. 물론 이성미·유홍준 교수의 비판에 대해 아직 간송박물관(한국민족미술연구소)측은 공개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한국 최초의 근대성의 맹아’라고 평가받는 진경시대를 둘러싼 논쟁은 21세기 한국의 최대논쟁 그 첫 번째로 기록될 공산이 크다. 단지 누가 먼저 거푸집에서 칼을 뽑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간송학파의 좌장 최완수씨가 말하는 겸재의 진경산수화법

남방·북방화법의 조화로운 배치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중국회화사에서 항상 시도하면서도 이루어내지 못했던 남북방화법을 성공한 데서 비롯된다. 남북방화법이란 중국 북방화법의 특징인 선묘(線描)와 남방화법의 특징인 묵법(墨法)을 이상적으로 조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산이 금강산이나 설악산처럼 화강암 암봉이 서릿발처럼 모여 있는 것과 오대산이나 지리산처럼 흙으로 덮여 있어 수목이 울창한 것으로 나뉘는 것에서 착안했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골산(骨山)인 경우는 북방화법인 선묘로, 수목이 우거진 토산(土山)은 남방화법의 묵묘로 표현하면서 두 가지 산의 모습을 조화롭게 배치하려는 의도다.

진경산수화법은 <주역>을 통달한 겸재가 골산을 양(陽)으로 보고 토산을 음(陰)으로 삼아 성리학의 기본경전인 <주역>(周易)의 음 양조화 원리에 맞춘 화면구성법이다. 이런 화법은 겸재가 36세 때(숙종 37년, 1711)에 금강산을 그려내면서 시도하기 시작, 60세(영조 11년, 1735) 이후에 완성해낸 독자기법이었다.

골산은 서릿발·도끼발 준법(바위결을 그리는 화법)을 써 절벽을 나타내기 위해 수직선을 길게 내리긋는 것이 특징이다. 흙산은 이른바 미가운산법(米家雲山法)을 주로 써서 비구름과 안개가 숲이 우거진 산봉우리를 휘감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는데 나무숲은 굵은 먹점(米點)을 몇 번이고 덧찍어 푸르름이 뚝뚝 흘러내릴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이런 진경산수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중국인이나 도인들이 아니라 모두 당시를 살던 조선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진경산수화와 더불어 진경시대의 양대화풍인 진경풍속화가 출현한다. 겸재에게서 싹이 보인 진경풍속화는 겸재보다 10년 후배로 다같이 율곡학맥을 잇고 있던 관아재(觀我齋) 조영석(1686-1761)에 의해서 기틀이 마련되고 단원 김홍도가 완성한다.

 
돌림담배 [2006-11-26 02:00:42]
“겸재 정선 그림 돌아왔다”
독일 수도원 소장 21점 인계 화첩 형태… 2009년 일반공개
2006-11-23  


독일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수도원에 있던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 21점이 화첩 형태로 지난해 한국에 돌아온 것으로 22일 확인됐다. 베네딕도회 소속 왜관 수도원의 선지훈 신부는 “정선의 화첩을 영구임대 방식으로 돌려받기로 하고 지난해 10월22일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직접 인계받았다"면서 "이 화첩은 현재 모처에 보관중이며 오틸리엔 수도원의 한국진출 100년이 되는 2009년 일반에 공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돌아온 정선의 화첩은 1924년 한국을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 당시 오틸리엔 수도원장이 수집해간 것으로 금강산 구룡폭포를 그린 '구룡폭(九龍瀑)', 조선시대 이성계가 거주했던 함경도 함흥의 궁궐에 있던 소나무를 그린 '함흥본궁송(咸興本宮松)' 등이 포함돼 있다.



'인곡유거도'에서 '동작진' 까지가 <경교명승첩>으로 묶인 그림들이고,
그 아래 '구룡폭'부터 '화표주'까지는 작년에 독일 수도원에서 영구임대 형식으로
되돌려 받았다는 화첩으로 묶인 낱장 그림들. 화첩 이름이 있을텐데...

출처 : 겸재정선기념관 건립공사
글쓴이 : 감리단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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